이란과 서구관계의 역사
이란과 서구관계의 역사
날짜: 2015년 7월 13일
2015년 7월 13일 현재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영국, 중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의 대표단과 이란의 대표단이 핵 협정 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협상은 지난 12년간 계속되어 왔다. 이번 회담에서 6개국가들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대가로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제약을 가하는 협정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비엔나에서 이란의 핵 개발 능력을 두고 이란과 서구가 벌이고 있는 협상은 이란과 서구간의 오랜 긴장관계 중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대 이후 우호적인 외교관계 구축을 위한 제안들이 오갔지만, 양측간에는 끊임없는 의심과 비밀스런 활동, 그리고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17세기 Shah Abbas 의 통치기간에는 이란왕조와 서 유럽간의 복잡한 정치관계가 존재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대성당 건축에 상당한 재정적 후원을 했을 만큼 기독교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지만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였던 Abbas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영국 그리고 프랑스와 군사적 동맹을 맺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란과 영국군이 연합하여 호르무즈섬에 주둔해 있던 포르투갈 군대를 축출하였지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군사적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유럽국가들간의 분쟁은 동양지역에서 많은 문제가 되었다. Brian Wittaker가 2009년 Guardian에 기고한 사설처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연합 구축에 실패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란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는 유럽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을 수도 있다.
20세기에 이르면서 이란과 서구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이란의 정치를 뒤에서 교묘히 조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이 같은 사실은 서구가 이란을 통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담론을 이란 내에 확산시켰으며, 1979년 이란형명정부가 선포되었을 때 유럽 그리고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수상인 Mohammad Mossadeq는 1953년 이란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려 하였다. 그가 수상에 임명된 1951년부터 그는 영국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이란 내 석유산업을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유화를 주장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원들은 근심스럽게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았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 모사데크가 이란을 소련의 공산진영에 가담시킬 수 있다는 걱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무렵 영국과 미국은 저렴한 가격에 원유를 공급하는데 있어 이란의 석유산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CIA와 영국의 정보기관은 모사데크를 축출해 내기 위하여 친-서방 그리고 친-샤 성향을 가진 인물들과 협력하였다. 이란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수상의 축출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1952년 첫번째 구테타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지속적으로 이란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CIA로부터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받았던 이란의 군부가 1953년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켰다.
1953년까지 CIA는 공식적으로 쿠테타에 관여한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 외무부도 공식적으로 이 사태에 대한 어떠한 그들의 어떠한 관여도 부정하였다. 1953년 이후 25년 이상 서방 정부들은 이란에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하면서 이란과 광범위하게 협력하였다. 1957년 미국은 샤와 민간분야 핵 협력에 사인하였으며, 이는 미국이 이란 내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직접적인 협력 제공을 의미하였다. 서구와의 협력에 있어 이란의 역할은 이란 국민들의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던 독재정권에 의해 정해졌다.
서구의 이란에 대한 간섭과 샤 정권에 대한 수 십 년간의 분개가 1979년 이란혁명과 함께 폭발하였다. 샤의 통치와 서구의 증대된 영향력에 대항한 수 개월 동안의 시위는 결국 샤의 망명을 이끌었다.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기 위하여 망명에서 돌아왔으며, 1979 4월 1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1979년 테헤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과 1983년 베이루트에 있는 미 대사관 폭탄트럭 공격을 계기로 미국은 이란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1985년 이란-콘트라 사건은 레바논 내 미국인 인질 구출에 이란이 도움을 주면서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불법적으로 이란 정부에 무기를 판매한 것으로, 이란과 서구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라 하겠다.
페르시안 걸프지역의 일련의 해상 분쟁은 1988년 USS Vincennes가 이란의 여객기를 격추시키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1990년대 미국은 이란 정부가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테러 공격을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양 진영은 계속적으로 불신하였으며, 서방 정부들은 정기적으로 이란을 테러리즘과 결부시켰다(2003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이란을 북한 그리고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분류 하였음). 반면 과거 서구의 이란내정 간섭을 빌미로 이란의 보수적인 정치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한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의 긴장관계와 외교적 단절 이후 서구와 이란의 대표들은 현재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절충안 마련을 위해 협상하고 있다. 과거 이란과 서구의 지도자들은 음모와 상호비방 그리고 분쟁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협상이 이란과 서구의 관계 완화를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New Historian
http://www.newhistorian.com/history-of-the-relationship-between-iran-and-the-west/4300/